최종 : 21/07/31 23:06



[今歷단상-7월22일]닉슨·키신저 미중화해 배경에 처칠이

리처드 닉슨이 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전을 앞두고 출마했을 때 헨리 키신저는 공화당 경선에서 닉슨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인 넬슨 록펠러 후보 캠프에 있었다.

닉슨이 공화당 후보가 되자 키신저는 록펠러의 권유와 추천에 따라 닉슨 캠프에 들어왔다.

둘은 공화당이라는 같은 울타리 안에 있다는 점을 빼고는 여러 점에서 달랐다.

닉슨이 미국 정치 주류에서 비껴나 있는 서부출신인데 반해 키신저는 뉴욕시장을 지낸 록펠러의 참모이던 경력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미국 주류 동부 출신과 가까웠다.

닉슨이 매카시스트라는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강력한 반공주의자였던 반면 독일 이민자 출신인 키신저는 공화당의 정치 스펙트럼에서는 닉슨과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물과 불처럼은 아니지만 물과 기름 못지않게 외면상으로는 섞이지 않았던 두 사람이 유방과 장량처럼 컴비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둘 다 철저한 현실주의적 정치적 탄력성을 생래적으로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19세기 초반 나폴레옹 전쟁 이후 세력 균형이라는 논리에 따라 유럽의 질서를 끌고 갔던 오스트리아 재상 메테르니히의 수제자인 키신저의 국제전략 비전에 닉슨이 공감했던 것은 그의 마키아벨리적 현실주의 정치 감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 접점이 있기에 닉슨과 키신저 컴비는 스틸웰, 마샬 그리고 트루먼으로 이어진 마오쩌둥의 공산중국을 호의적으로 본 시각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닉슨-키신저는 스틸웰-마샬-애치슨-트루먼처럼 마오쩌둥을 중국의 토지 혁명가로 보는 전략적 청맹과니와 좌고우면 주의자는 아니었다. 아니 문화대혁명을 목도한 두 사람이 그런 시각에서 마오의 중국을 보았을 리는 없다.

아니 그보다는 소련이라는 더 큰 적을 견제하기 위한 프래그마티즘적인 입장과 마키아벨리즘적인 자세가 배합된데서 비롯한 '적과의 동침' 전략적 선택에 따라 마오와 손을 잡았던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보자면 닉슨과 키신저를 연결시켜준 세계전략적 멘토는 윈스턴 처칠이다.

처칠은 당대 영국의 정치 스펙트럼에서 가장 사회주의와 멀었던 인물이다. 소련을 '철의 커튼'이라고 가장 먼저 비난의 포문을 열었던 인물도 처칠이었다.

그런 처칠은 2차대전 당시 유고의 공산주의자 티토를 전략적 동침의 파트너로 삼았다.

나치 독일이라는 주적을 가장 효과적으로 견제할 수 있는 실질적 군사 세력이 티토였기 때문이었다.

처칠은 나치 독일 등 파시스트 세력이 유럽에서 제거된 뒤 소련이 주적으로 부상하고 중국 대륙에서 마오가 패자가 되자 신속하고 냉혹하게 공산중국을 전략적 파트너로 삼아야 한다는 자세에서 공산 중국을 자리매김했다.

처칠은 마오를 토지 개혁가로 보는 순진한 시각에서는 벗어나 있었다. 그러나 소련보다는 덜 치명적이라고 보았다.

'비상도 약이다'라는 철저한 실리주의가 엿보이지 않는가.

닉슨과 키신저기 마오의 공산 중국과 악수한 배경에는 처칠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스위프트-류야저우-버크왈드>

류동희 차이나워치 대표 2019년 7월22일

2021/07/22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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