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21/09/25 00:03



[今歷단상-9월1일] 중국공산당의 하이드씨

1991년 8월19일 발생한 소련공산당 강경 보수파의 군부를 앞세운 반(反) 고르바초프 쿠데타가 3일천하로 끝난 뒤 연금된 휴양지에서 모스크바로 돌아온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그 직후 보리스 옐친과 함께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기자회견 단상에 섰다.

고르비는 '에빌 드래곤(사악한 용)'에 잡혀 지하감옥에 갇힌 '현명한 군주'로 옐친은 맨손으로 그를 구출한 '백기사처럼 보였다.

둘이 카메라 플래시 속에 함께 나란히 단상으로 걸어와 회견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고르비는 소련 연방 대통령이었고 옐친은 불과 2개월 전 치러진 러시아 대통령 첫 직선에서 당선된 러시아 공화국 초대 대통령이었다. 고르비 역시 1990년 3월 선출된 첫 연방 대통령이었으나 간접 선거 방식을 통해서였다.

고르비는 소련 공산당 당수인 서기장이였고 옐친은 1990년 7월 12일 탈당했다. 그러나 당에 있을 때 옐친은 '허가 받은 반골'이란 별명을 들을 정도로 개혁파 인사들에게 영향력이 강력했다.

겉으로는 대립하나 이심전심 관계라고도 했고 역할 분담의 동지적 관계로 간주됐다. 역시 기자회견 시작 전까지.

단상에서 고르비는 "나는 사회주의자다"라고 말했다. 옐친은 그런 그를 그로기 상태로 몰았다.
고르비의 브레인 중 브레인 야코블레프는 이 발언을 두고 " 고르비의 정치적 발언 중 일생일대의 실언"이라고 나중에 회고했다

모스크바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유폐된 사흘 동안 소련 국민의 민심이 어떻게 확 바뀌었는지를 파악할 수 없었으며 그래서 천하의 대세가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뒤집어 진 것을 인식할 수 없었다는 것이 야코블레프의 분석이었다.

본심 여부와는 관계없이 그 자리에서 그 말은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보물섬'과 함께 영국 소설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대표작 '지킬박사와 하이드씨'는 이중인격의 '착한 인격인' 지킬박사가 '악한 인격' '하이드씨'를 이겨내지 못하고 죽는 것으로 끝이 난다.

소련공산당 입장에서 고르비는 지킬박사였다. 그러나 지킬 박사는 자신의 분신이라고 여긴 '하이드씨' 옐친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고르비의 '나는 사회주의자다‘ 선언 뒤 고르비의 소련공산당 탈당( 8월24일) 그 닷새 뒤 소련 의회 두마의 소련공산당 해체 의결 등 소련이 숨가쁘게 돌아가는 1991년 9월1일 "중국공산당은 소련공산당 해체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를 고수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불과 2년 전 1989년 6월4일 천안문 유혈 진압의 기억이 생생하였기에 리펑은 중국공산당의 하이드씨를 대변한다.

소련공산당의 상징인 '낫과 망치'의 적기가 크렘린궁에서 내려진 1991년 12월25일 한달 뒤 중국공산당의 '지킬 박사'가 전면에 나섰다.

88세의 덩샤오핑이 남순강화를 시작한 것이다.

덩은 '계획경제는 사회주의가 아니다'라는 말로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도화선에 불을 붙였고 '좌(左)와 우(右)도 모두 경계해야 하지만 더욱 경계해야 하는 것은 좌이다'라고 말했다.

1992년 10월 14차 중국공산당 전당대회(14대)는 '지킬 박사'가 '하이드씨'를 압도하고 있음을 총결산하는 자리였다.

천안문 유혈진압이 중국공산당의 '하이드씨' 극성기였다면 14대는 '지킬 박사'의 절정기였다.

고르비는 '정치 우선 경제 다음'을, 덩샤오핑은 '경제 우선 정치 다음‘이었다. 똑같이 개혁을 추구하면서도 순서가 정반대였다.

조삼모사의 고사에서 알 수 있듯이 똑같은 것을 가지고 소련공산당은 '조사모삼'를 해서 실패했고 중국공산당은 '조삼모사'로 일단 성공한 셈이다.

<스위프트-류야저우-버크왈드>

류동희 차이나워치 대표 2019년 9월1일

2021/09/01 00:33


경제| IT | 사회 | 정치 | 양안 | 문화 | 대만 | 홍콩 | 한중Biz | 한반도 | 인물동정

 
Copyright 2000 ChinaWatch.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