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22/09/26 22:34



[今歷단상-7월17일] 장제스 강요 당한 패착

장제스는 일본 군사학교에 유학을 다녀온 때문인지 독일이나 프랑스와 같은 서양 군대보다는 일본 군대의 영향을 많이 받은 인상을 준다. 국민정부군(국부군) 제복부터 그렇다.

하지만 그런 장제스이지만 중국에 굴욕을 안긴 일본에 대한 적개심은 남달랐다.

일본 유학 시절 교관이 훈련 중 연병장 땅바닥에 사각형을 그린 뒤 중국인들이 인구가 많지만 이 사각형 안에 들어 있는 벌레와 세균과 같은 존재라고 인구대국 중국을 깔보는 발언을 했다.

그러자 장제스는 교관 앞으로 나가 땅 위에 그려 놓은 그 4각형을 9등분한 뒤 9개의 4각형 중 한 곳을 짚으며 일본인은 이 좁은 곳에 살고 있는 존재에 불과하다고 쏘아 붙였다.

이처럼 중국인으로서 자존감과 반일의식이 강한 장제스였지만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장악한 뒤에도 공산군 토벌에 주력한 것은 '내부의 적이 외부의 적보다 더 무섭다'라는 신념 때문이었다.

또한 그는 국공합작 기간 공산당의 조직 활동과 선전 투쟁 및 지향하는 방향을 잘 파악하였기에 결코 공존할 수 없는 존재이자 틈을 주어서는 안 되는 가장 위험시해야 할 최대적으로 간주했다.

청나라 말기 이홍장과 좌종당 등과 함께 기독교 영향을 받은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한 유생 출신 한족 관료 증국번을 인생의 지표로 삼았던데서 알 수 있듯이 장제스는 중국의 전통 이념인 충과 효가 중국 미래에도 면면히 이어져 나갈 것이며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이 질풍노도처럼 중국 대륙을 휩쓸 때 장제스는 공자를 추앙하는 캠페인을 강화했다.

서양 종교개혁 시기 반종교개혁 운동이라는 대항 이데올로기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던 것과 같은 반문화혁명 운동을 벌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장제스는 자신을 국민혁명군의 최고 사령관으로 발탁한 손문이 죽은 뒤 불과 2년 만에 쿠데타를 일으켜 손문이 이룩한 국공합작을 철저하게 와해시켰고 공산 세력이 구축한 장시 소비에트를 상대로 다섯 차례에 걸친 토벌전을 벌여 서북 변구 쪽으로 밀어 붙였다.

그러나 꺼진 불티도 짓밟아버려야 한다는 자세로 일본 침략군에 쫓겨 자신의 근거지에서 밀려난 장쉐량군에게 자신이 직접 날아가 공산군 잔존세력 완전 섬멸을 다그쳤던 것이다.

시안사변으로 목숨이 경각 중인 상황에서도 그는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버티던 그는 결국 난징에서 날아온 부인 쑹메이링과 저우언라이의 설득에 따라 항일전에 먼저 나서기로 방향을 트는 결단을 내렸다.

일본의 침략과 비공산투항 세력의 기습 반란과 국민당 내 반장제스 세력의 불온한 움직임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장은 이런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는 그로서는 '강요당한 패착'이었다.

장제스는 이처럼 잘못 꿰어진 첫 단추를 바로 잡기 위해 노력했다. 공산당이 구밀복검 자세이며 면종복배임을 한순간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중국 대륙 전체를 내주는 결과를 빚고 말았다. 이는 뒤집어 보면 그가 죽음을 각오하면서도 지키려던 '선공산군 섬멸 후 대일항전'이 옳은 선택이었음을 반증한다.

스페인의 프랑코는 이 노선을 성취하였기에 유럽 대륙에서 파시스트 강국인 나치 독일과 무솔리니의 이탈리아가 멸망한 가운데서도 파시스트 정권이면서도 권력을 유지, 스페인의 공산화를 막았다.

장제스는 중국 대륙을 상실했음에도 '자멸하지 않은 항우'가 되었고 '자결당하지 않은 부차'가 되었다. 강인함에 있어서는 마오쩌둥, 오나라의 부차 그리고 초패왕 항우를 능가한다는 평가를 내리지 않을 수 없다.

장제스는 비록 대만섬에서 대륙을 바라보며 숨을 거두었지만 초한 쟁패가 한나라의 최종 승리로, 와신상담의 싸움이 월나라 구천에 불가역적 승리로 돌아간 것과 같이 마오쩌둥과 장제스의 다툼이 마오의 것으로 마침표를 찍기에는 아직 주저된다.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제정 러시아는 소멸됐고 황제 니콜라이 2세 가족은 다음해인 1918년 볼셰비키에 의해 암살됐다.

그러나 1991년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소련 대통령직에서 사임한 직후 크렘린궁 앞의 깃대에서 소련의 낫과 망치의 적기는 내려가고 러시아 국기가 올라갔다. 제정 러시아의 부활은 전혀 아니었다. 그러나 국기는 제정 러시아 때의 바로 그것이었다.

어찌 알겠는가. 장제스가 하늘위에서 중국 대륙에서 청천백일기가 휘날리는 것을 보는 날이 올지를.

덩샤오핑에 의해 시장경제가 도입되고 정착화하면서 공자는 중국 대륙에서 부활됐다. 공산화 이전 처럼. 마오쩌둥은 박제된 우상적 존재로 굳어지는 가운데….

<스위프트-류야저우-버크왈드>

류동희 차이나워치 대표 2019년 7월17일

2022/07/17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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