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22/09/26 22:34



[今歷단상-7월18일]노대국 아시아의 영원한 국익 작동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은 20세기에 들어 그 비대한 몸을 주체하기가 어려워 '선택과 집중'의 전략을 노골화하였다.

그리고 그 선택의 기준은 '영원한 국익'이었다.

유럽에서는 '집중'에 방점을 아시아에서는 '선택'에 주의를 기울였다

19세기 중반 '잠자는 사자' 중국을 간단하게 물리쳐 대영제국이라는 오만에 듬뿍 취해 있던 영국은 20세기로 세기가 바뀐 3년째가 되는 1902년 불과 그 얼마 전까지도 우습게 보았던 동북아의 일본과 동맹 조약을 체결했다.

이는 영국이 최대 위기 상황이었던 나폴레옹 극성기에도 견지하던 '영광스러운 고립 정책'을 폐기한 것이었다.

무섭게 동진하는 러시아의 태평양 진출을 차단하고 중국에서 구축한 자국의 익을 보호 하며 또한 식민화한 인도를 지켜내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일본과 동맹 체결 뒤 왕세자를 일본에 친선방문하게 할 정도로 일본에 대한 영국의 예우는 각별했다.

영국 왕자의 일본 방문 때 세일라복의 일본 여학생들이 가두에 몰려나와 환호했다고 한다. 일본 역시 감격했던 모양이다.

이 모든 것은 동북 아시아에서 영국의 국익을 최우선에 둔 것이었다. 일본의 국익은 동반 상승했다. 대한제국은 버리는 카드였으며 중국에 대한 고려는 뒷전이었다.

러일전쟁이 벌어졌을 때는 러시아 발트함대가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지 못하도록 막아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을 돌아 지구의 반 바퀴를 가야하는 승리의 '희망 없는 항해'를 하도록 만들었다.

중국이 최대 위기였던 중일전쟁 시기인 1940년에는 충칭으로 쫓겨간 장제스 국민정부의 생명줄인 버마루트를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여 차단한 것도 '영원한 국익'에 따른 선택이었다.

당시 유럽에서 영국은 일본과 추축동맹 관계인 나치 독일과 사생결단의 전쟁을 벌이는 상황이었다.

1941년 12월7일 진주만 기습후 미국과 함께 중국을 지원하며 일본과 싸워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으나 장제스군이 버마로 진군하는데 미국과는 달리 어깃장을 놓았다.

중국군의 군사적 성공이 영국의 식민지 지배 국가인 버마와 인도에 대한 자국의 이익을 침해할 수도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장제스군에 대한 과대평가로 이는 오판이었으나 이 역시 '영원한 국익'에 따른 선택이었다.

소련을 '철의 커튼'이라고 맹비난하면서도 소련의 지원 아래 공산 중국이 중국 대륙을 장악하자 서방국 중에서는 가장 먼저 국가 승인했다. 1950년 1월이었다.

가장 빠르고 신속하게 패자에게는 눈도 돌리지 않고 승자의 손을 들어 준것이다. '영원한 적도 영원한 우방도 없다'를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영국은 미국과 함께 유엔군으로 참전했다. 이는 소련을 의식해서였다.

공산 중국의 중공군의 개입이 있게 된 뒤 영국은 어정쩡한 입장으로 선회했으며 휴전협상 과정에서 한국의 입장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영원한 국익'이 작동했다.

1972년 2월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공산 중국을 방문한 다음달 지체없이 공산 중국과 수교했다. 이 또한 '영원한 국익'에 따른 선택이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영국은 21세기 들어 중국이 굴기하는 가운데 아시아 인프라 투자 은행 (AIIB)을 설립하자 미국의 노골적인 우려 표명에 회원국으로 일찌감치 가입했다.

2018년 7월부터 미국과 중국이 무역과 전략적 미래를 놓고 전쟁을 벌이는 상황에서 영국은 미국 쪽으로 기울어지고는 있으나 일방적인 미국 편은 아니다.

사물인터넷을 고리로 한 4차산업 헤게모니 쟁탈전인 화웨이 사태에서도 역시 그러하다.

'영원한 국익 '추구에서 영국은 여전히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때와 마찬가지로 철저하다.

<스위프트-류야저우-버크왈드>

류동희 차이나워치 대표 2019년 7월18일


2022/07/18 0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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