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22/09/26 22:34



[今歷단상-7월27일] 국공내전 승패의 4축 토지개혁

...군기와 오열 그리고 선전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知彼知己 百戰不殆).'

'...... 백번 싸워도 승리한다'로 자주 오독되는 '손자병법'에 나오는 이 경구를 국공내전에 적용해보자. '승패는 병가지상사'이니 승패는 하늘에 달렸지 인간이 결정하지 못한다. 제갈공명이 오장원에서 죽음을 앞두고 다음과 같이 탄식했다고 하지 않은가.

'일을 꾀하는 것은 사람이나 일을 이루어내는 것은 하늘에 달렸다( 謀事在人 成事在天)'.

'지피지기'를 충분히 했어도 워털루 회전에서 나폴레옹처럼 패배하는 법인데 국공내전에서 패배한 쪽은 '지피지기'마저 충실히 하지 못했으니 패배는 불가피 했다.

1차 국공내전 때 장제스로 대표되는 국민당 우파는 '지피지기'했다.
장제스는 국민당과 합작관계인 공산당의 궁극적 목표가 국민당을 거꾸러뜨리고 중국 천하를 공산화시키는데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이런 그들이기에 장제스는 타도해야 할 군벌세력보다 '마지 못해 동침한 내부의 적'을 더 위험시했다.

또한 국민당 내부에 용공세력이 가득하다는 점도 잘 알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국민당 우위의 국공합작 체제가 공산당 우위로 뒤바뀔 위기감을 절실히 의식했다.

상대적으로 공산당은 자신의 목표와 역량을 잘 알고 있었으나 상대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장제스의 국민혁명군이 상하이에 진입하기도 전에 상하이의 군벌세력을 쫓아내고 접수하여 장제스의 불안감을 증폭시킨 것이 '지피'에서의 최대 실책이다.

장제스는 1927년 4월12일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켜 국공합작을 무너뜨리고 5차에 걸친 공산당 토벌에 매진하여 공산당을 벼랑끝까지 몰고 갔다.

1936년 12월 시안사변을 계기로 2차 국공합작을 이룰 때 국민당도 공산당도 '지피지기' 자세로 임했다.

그러나 1946년~1949년까지 2차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은 패배했다.

국민당은 시안사변으로 노정된 '지기'에서 틈을 메꾸는데 실패했다.

우선 장제스의 국민당은 토지개혁을 거부하는 세력이라는 프레임에 갇혀 버렸다.

공산당은 2차 국공합작 과정에서 지주의 토지몰수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나 이는 공산당의 정체성과 배치되는 것으로 전형적인 위장 공세였다.

2차 국공내전이 발생했을 때인 1946년 국민당은 토지개혁에 아무런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고 이는 패배의 결정적 요인이었다.

1927년 국민당의 국민혁명군은 중국을 할거하는 군벌들을 타도하는 '혁명세력'으로 간주되었으나 1946년의 국민당은 토지개혁이라는 시대의 흐름에 역류하는 '반동세력'으로 자리매김 됐다.

중국과 베트남이 공산화된 반면 우리나라가 공산화가 되지 않은 이유 중 핵심적인 차이로 토지개혁을 든다.

남부 베트남, 즉 월남 정권은 프랑스 식민시대부터 정치적 영향력이 강한 가톨릭 세력 때문에 토지개혁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월남의 성당들은 대지주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선 뒤 토지개혁을 실시하였다.

반공적인 한민당이 지주세력이었으나 일제 때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한 대통령 이승만은 토지 문제에서 초연한, 아니 한민당과 세력 기반에서 대립되는 처지였기에 거리낌 없이 시대의 흐름인 토지개혁을 과감하고 당차게 밀어붙일 수 있었다.

일찌감치 북한에서는 토지개혁이 실시됐으나 바로 토지 집단화로 이행하는 바람에 도리어 거센 역풍을 맞고 있었다.

1950년 6.25 사변 때 북한 정권의 토지개혁 메리트는 사라졌고 아니 오히려 정권이 초대지주가 되어 있기에 불리한 처지로 돌변해 있었다.

우리나라 남한의 다수 소작농민이 중국 인민이나 베트남 농민과는 달리 공산세력에 적극적으로 동조하지 않은 것은 이승만이 추진한 토지개혁 효과 때문이었다.

장제스의 국민당은 1차 국공내전 때 국민혁명군과 2차 국공내전 발발 직전의 국부군이 달라져 있었다는 것을 파악하지 못했다.

'어제의 다윗'은 '오늘 골리앗'으로 간주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2차 국공내전 때 국부군은 투항한 군벌세력을 옥석구분 없이 받아들여 몸집은 비대할 대로 커졌지만 탐욕스런 공룡으로 변해 있었다. 시안사변이 경고였으나 근본적 처방을 하는데 실패했던 것이다.

때문에 국부군은 부패 복마전이 되었고 상대적으로 공산당은 역대 농민 반란세력이 백성의 지지를 받기 위해 썼던 엄정한 규율을 앞세워 국부군과 차별화하는데 성공했다.

이외에 1차 국공합작 기간 국민 혁명군 내부에 침투했던 또는 투항한 과거 군벌세력 뒤에 도사리고 있던 오열(五列 ; 군대 기본편성의 4개 열 밖에 다섯 번째 열이라는 비유로 이적세력 또는 간첩을 지칭)을 소탕하지 못한 것과 공산당의 선전 선동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것이 지적되고 있다.

또한 개전 초기 만주지역에 주력군을 성급하게 투입시켜 미군이 베트남전 정글 수렁에 빠진 것과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의 산악지대에 갇혔던 것과 같은 우를 범했던 대전략의 실패(미군 고문 웨드마이어는 일제에 14년간 지배되어 외국과 마찬가지인 만주에 점령군처럼 진입하지 말고 대치하다가 공산군의 자체 모순이 발생할 때에 공격할 것을 권고하였다고 한다)가 있다.

미국 트루먼 행정부 내 용공세력과 유럽 중시 세력의 중국공산당에 대한 착시(일부는 고의적이었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가 겹쳐있던 점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2차 국공내전 당시 국민당은 '지기' 에서도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적의 외연을 확대하여 살피지 못하고 외눈박이 시각에 빠져 있었던 점을 보면 '지피'에서도 실패한 셈이다.

<스위프트-류야저우-버크왈드>

류동희 차이나워치 차이나워치 대표 2019년 7월27일

2022/07/27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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