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22/08/12 23:32



[今天歷史-8월4일] 重慶천도, 버마 원정군 철수

청나라 여학교 장전 제정, 정몽헌 투신자살, 윤심덕 현해탄서 투신 자살, 훈 할머니 귀국, 한국 제헌의회 신익희 의장-김약수 부의장 선출, 한국
베트남 파병안 통과, 김정일-푸틴 모스크바서 정상회담

1942년 = 중국 국민정부의 버마 원정군이 철수를 완료하였다.

인도로 후퇴한 제38사( 쑨리런 지휘)와 22사를 제외한 부대는 장제스(蔣介石)의 지시에 따라 두위밍(杜聿明)의 지휘아래 일본군의 포위망을 뚫고 난방강(南?江), 메이먀오(梅苗), 남칸(Namkan) 서쪽을 거쳐 중국으로 되돌아 왔다.

하늘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울창한 밀림을 헤치며 진행된 이 후퇴는 참담한 것이었다. 국부군은 추격하는 일본군의 산발적 공격과 낙오, 실종, 병사 등으로 인해 10만 명의 병력 중 6만 명을 잃었다. 전투에 의한 희생자보다도 비전투적 원인으로 인한 사망자가 수배나 많았다고 한다.

후미의 군대는 이곳 저곳에 널려진 전우의 시체를 목도해야 했다고 한다.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이후 필리핀 베트남 을 거쳐 버마까지 장악 하려는 일본군을 저지, 서방의 중국 지원 루트를 보호하려던 국부군의 버마 원정은 초기부터 방어적인 상황에 빠졌으며 결국 전세를 만회하지 못하고 참담한 패배로 막을 내린 것이다

미국 해군은 1942년 6월 5일부터 7일 까지 벌어진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 연합 함대를물리쳐 전세 반전의 전기를 마련했으나 국부군은 인도차이나 반도에서의 제2 전선을 구축하는데 실패하고 만 것이다.

이는 미국에 장제스의 국민당군에 대한실망감을 안겻고 그들에 대한 전략적 효용성에 대한 의문을 불러 일으켰다. 다른 한편으로 중국 서북부 후방 지역에서 게릴라 전을 통해 일본군의 전략적 입지를 효과있게 괴롭히는데 성공한 중국 홍군에 대해 미국 지도부가 눈길을 돌리는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1942년 상반기 버마 전선에서의 국부군의 참패와 1940년 후반기 펑더화이가 지휘한 백단대전( 1940년 8월 20일 ~ 1940년 12월 5일) 등 중국 대륙 서북 후방 지역에서의 괄목할만한 홍군의 선전은 2차 대전 종전후 미국트루먼 행정부가 홍군에 우호적인 처신을 하도록 만들어 장제스가 국공내전개전에서 실기하는 원인으로 작용, 공산 세력이 대륙을 장악하는 여러 요인의 한 배경이 되었다.

[今天歷史-8월20일] 百團大戰, 중국 동맹회 성립

일본군은 1944년 인도 동부 아셈지역을 공격, 버마루트를 봉쇄하려던 이른바 '임팔 전투'를 전개하였는데 3개 사단을 동원한 공격에서 빈약한 장비와 보급 부족으로 참패, 9만여명 병력 중 7만 이상을 잃었다.

전사보다도 굶주림과 질병 때문에 이 같은 막대한 손실을 당한 것이다. 국부군의 2년 전 대패주를 고스란히 되풀이한 것이다.

1906년 = 청나라 조정은 ‘여학 교육장정(女學校育章程)’을 제정하여 전국 여자학당의 규범으로 삼게 함.

세계사 속의 오늘

영국이 독일에 선전포고함으로써 1차 대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며 미국은 중립을 선언했다(1914).

‘안네의 일기’의 저자 안네 프랑크 가족이 독일군에 체포됐다(1944).

우리나라 역사 속의 오늘

정몽헌(鄭夢憲) 현대아산 회장이 자신의 집무실에서 투신자살했다(2003). 정몽헌 회장은 현대그룹을 창설한 고 정주영(鄭周永) 명예회장의 다섯째 아들로 향년 55세(1948~2003)였다.

그가 자살한 날은 현대그룹이 북한과 금강산유람선 관광사업을 위한 합영회사 설립 계약을 체결한 지(1998) 5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캄보디아의 한국인 종군위안부 '훈 할머니'가 귀국했다(1997). 하지만 훈 할머니는 한국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캄보디아로 돌아갔으며 거기서 생을 마쳤다.

세계 최대 단일 비료공장인 남해화학 여수공장이 준공됐다(1977).

제헌국회가 의장과 부의장에 각각 신익희(申翼熙)와 김약수(金若水)를 선출했다(1948). 김약수는 1949년 국회프락치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

김약수(金若水 1892∼?)

노동운동가·정치가. 경상남도 동래(東萊) 출생. 두전(杜全) 또는 두희(杜熙)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다. 휘문의숙(徽文義塾)과 경성(京城)공업학교를 졸업하고, 1918년 김원봉(金元鳳)·이여성(李如星) 등과 함께 만주·상하이〔上海〕를 거쳐 난징(南京)의 진링(金陵 :금릉)대학에 입학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여성과 함께 귀국하여 1920년 박중화(朴重華)·박이규(朴珥圭) 등과 한국 최초의 노동운동단체인 조선노동공제회(朝鮮勞動共劑會)를 창설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 뒤 일본으로 건너가 흑도회(黑濤會)·북성회(北星會) 등을조직, 《척후대(斥候隊)》 《대중시대(大衆時代)》 등을 펴내다가 1922년 귀국하였다.

귀국 즉시 이헌(李憲)·김종범(金鍾範)·마명(馬鳴) 등과 북풍회(北風會)를 조직하여 국내 사회주의운동의 한 분파를 이루게 되었다.

그 뒤 조선공산당을 조직하여 코민테른의 승인을 받았으나, 8·15 후에는 좌익노선에서 이탈하여 한국민주당·민중동맹(民衆同盟)에서 활약하였다.

1947년 조선공화당을 창당하여 서기장이 되었고, 1948년 제헌의원에 당선되어 초대국회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1949년 남로당 국회프락치사건에 연루되어 복역하던 중에 6·25가 일어나자 출옥하여 월북하였다. 1956년 재북 평화통일촉진협의회 상무위원 겸 집행위원이 되었으나, 1959년 반당혁명분자로 지목되어 평안북도 벽지로 추방되었다.

조선이 지방행정제도 개혁하여 전국을 13도로 개편했다(1896).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모스크바에서 정상회담을 가졌다(2001).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안이 국회를 통과했으며(1964), 충남 천안의 독립기념관에서 누전으로 화재가 발생했다(1986).

'사의 찬미'를 부른 여류 성악가 윤심덕(尹心悳)이 현해탄 관부(關釜) 연락선 상에서 극작가인 애인 김우진(金祐鎭)과 투신자살을 했다(1926).

2022/08/04 2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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