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22/09/26 22:34



[今歷단상-8월6일] 폴란드 망명정부 지폐와 쫓겨온 드골

장제스는 1949년 기록필름 속에서 항상 미소를 잃지 않고 있었다. 그해는 장제스 인생에서 최악의 해였다.

1월 국공내전 3 대 전투 중 전국(戰局)을 결정하는 화이하이 패배로 화북 중앙지대를 상실하고 전 수도 베이핑(베이징)을 실함했다.

베이핑 방어 국부군 사령관이 공산군에 항복하기에 앞서 수도 난징의 장제스는 총통 직에서 일단 사임하고 고향인 저장성 펑화현으로 위장 은퇴했다.

필자는 1975년 장제스 사망 뒤 우리나라 방송국에서 방영한 장제스 일대기 기록필림에서 그 직후 장제스가 부인 쑹메이링과 함께 고향에 모셔진 사당의 어머니 위패에 참배하는 모습을 보았다.

장제스 부부는 머리 숙여 절을 하였는데 두 부부의 표정에서는 잔잔한 미소가 떠돌았다.

그때 그 순간이 장제스와 그의 정치적 동지인 쑹메이링의 인생에서 최악의 시기였다는 것은 뒤에 알게 되었다

그 장면을 처음 볼 때 잠깐 스쳤던 사당에 참배하면서 왜 저리 미소를 지을까하는 의문의 답은 그가 처한 당시 사정을 잘 알게되면서 나왔다.

'우리 부부는 무너지지 않았다'라는 메시지였던 것이다.

장제스의 모친은 아버지를 일찍 잃고 허약하고 병치레가 잦았던 어린 장제스를 불요불굴한 인물로 키워냈다. 장제스는 그 어머니의 그 아들이다.

인생 최악의 시기에 전혀 낙심하거나 침울한 표정을 대중에 보이지 않았다.

이 장면 뒤에 이어진 필름에서 장제스는 공산군에 수도 난징을 내주고 악화일로로 밀리는 와중에 시찰과 회의 등 대책에 분주하였지만 그의 얼굴에서는 잔잔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1949년 8월6일 우리나라 진해를 방문했을 때 이승만 대통령과 찍은 기념사진에서도 장의 그 미소는 여전했다.

하지만 그때 장이 처한 상황은 최악 시기의 최악 순간이었다.

당시 우리나라 8월 6일 오전은 미국 워싱턴 시각으로 8월5일 밤이었다.

장제스가 진해에 방문한 당일 미국 트루먼 행정부는 '중국 백서'를 발표했다.

트루먼 행정부는 아직 국공내전이 완전히 종결되지 않은 시점에서 2차대전 동맹국 중화민국을 선물거래 풋옵션 처리했다.

중국 국민정부와 장제스는 김광균의 추일서정의 첫 구절에 나오는 ' 낙엽은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 포화에 이즈러진 도룬시를 생각나게 한다'의 '낙엽' 취급을 당했다.

또한 2차대전 초기 덩케르크 철수 때 가까스로 영국으로 망명한 샤를르 드골 취급을 한 셈이다.

당시 프랭클린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은 세계전략 논의 상대로 윈스턴 처칠은 대우했으나 드골은 '듣보잡'으로 여겨 투명인간 취급했다.

전쟁에서 패한 지도자와 가능성이 없다고 본 지도자에 대해서는 미국은 프래그마티즘적으로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매정하게 처리한다.

1975년 캄보디아 공산화와 베트남 공산통일 뒤 캄보디아 론놀과 월남 구엔 반 티우와 구엔 카오 키에 대해서도 미국은 그런 취급을 했다.

대통령을 지낸 티우와 외유 중이던 국가원수 시아누크공을 쿠데타로 내쫓고 그 자리를 차지했던 론놀에게는 미국에서 여생을 보낼 수 있게 해주고 티우 밑에서 고분고분하지 않았던 총리를 역임한 키에게도 미국에서 주류상을 하며 경제적으로 여유있게 살게 해주었다.

베트남전 과정에서 미국을 도운데 대한 나름의 배려였다. 그러나 그 이상은 아무것도 없었다.

진해회담 기록을 살펴보면 이승만 대통령도 예우는 각별했으나 광해군이 명나라를 상대하듯 실리적으로 장제스 국민정부와 교섭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유일하게 승인한 국가가 장제스 국민정부였다. 또 카이로 선언에서 한국의 독립을 약속하는데 장제스가 절대적 역할을 했다.

장제스와 국민정부는 한국에게 있어서는 백골난망의 은인이었으나 궁지에 처한 국민정부를 적극적으로 도울 처지가 전혀 아니었다.

장제스로서는 '부르터스 너마저도'냐는 말이 나올 수도 있었겠으나 그는 전혀 그런 표정을 짓지 않았다. 그 잔잔한 여유만만한 미소을머금은채 말이다.

장제스는 최악의 상황이 계속되는 가운데서도 불요불굴한 자세를 지켰다. 그리고 포기하지 않고 반전을 도모하며 버텼다.

세계 모두가 그를 버린 가운데 그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표정으로 그를 따라 대만섬에 온 추종자들이 실낱 같은 희망을 버리지 않게 했다.

1950년 2월 중소동맹 체결과 6월 한국전 발발로 국제정세가 반전되면서 대만의 중화민국은 더 이상 나락으로 떨어지지는 않게 됐다.

하지만 바다를 건너 권토중래하지 못했다. '남겨둔 불티들로 초원을 불태운다'는 신화도 이룩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는 1975년 죽었고 사후 44년 뒤 대만은 그의 희망과는 다른 방향을 모색하는 흐름이 날로 거세지는 도정 상에 놓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 체제 이념과는 화합하기 힘든 중국 전통사상의 씨앗을 보존시킨 데는 장제스의 역할이 크다.

2019년 홍콩에서 시위는 장제스가 뿌려 놓고 간 불씨와 통한다.

홍콩 식민주의가 영국 이익에 맞게 취사 선택 주입한 자유 민주주의와도 다르고 공산 중국의 정치 이데올로기와는 더욱 더 먼 그러나 왕도사상과는 공통 요소가 많은.

<스위프트-류야저우-버크왈드>

류동희 차이나워치 대표 2019년 8월6일

2022/08/06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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