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22/09/26 22:34



[今歷단상-8월8일] 디엠과 티우의 한국전 각주구검

1963년 11월2일 월남 대통령 고딘 디엠 대통령이 미국 CIA의 조종 아래 일어난 군부 쿠데타 와중에서 암살됐다. 정보 부문을 장악하던 그의 동생 고 딘 누 역시 피살됐다.

디엠 정권은 족벌정치, 부패와 불교도 탄압 등으로 국민의 강력한 저항을 받았으나 디엠은 공산 세력과 대결하려면 강력한 통치가 불가피하다며 유화책을 압박하는 미국에 전혀 고분고분한 자세가 아니었다.

이승만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진 바 있는 디엠은 공산 군의 침략을 맞아 미국의 지원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상황에서도 이승만이 미국과 영국을 상대로 외교전을 벌여 자국과 자신의 정치적 실리를 최대한 얻어낸 것을 보고 그를 역할 모델로 하였다.

디엠은 1963년 최악의 정치적 위기 상황에서 10년 전인 1953년 이승만이 반공포로 석방이란 기상천외의 건곤일척 승부수를 던져 '한미 방위 조약'이란 선물을 쟁취한 것을 생각했을 것이다.

1953년 미국 공화당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이승만을 실각시키고 장면 또는 이종찬을 새로운 한국의 지도자로 내세우는 '에버레디 작전'을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그러나 1963년 민주당 케네디 행정부는 디엠 정권을 무너뜨리려는 CIA의 활동을 묵인했고 이는 두옹 반 민, 구엔 반 티우와 구엔 카오 키 등이 주동한 군부 쿠데타로 이어졌다.

디엠은 10년 사이에 국제정세 미국의 입장 그리고 국내 정치 상황 등 모든 것이 바뀐 줄 모르고 각주구검(刻舟求劍)한 셈이다.

디엠 암살 20일 뒤인 1963년 11월22일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은 재선 운동차 미국 텍사스주 댈러스를 방문하던 중 암살당했다.

케네디 행정부에서 법무장관을 맡았던 케네디 대통령의 친아우 로버트 케네디는 5년 뒤인 1968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선출 선거전에서 승리, 후보가 된 직후 암살됐다.

월남 고딘 디엠 형제의 암살과 결코 무관할 수 없는 케네디 형제도 아이러니컬 하게도 암살로 비명에 간 것이다.

1975년 초 월남 구엔 반 티우 대통령은 17도선에서 벌어진 월맹과 전투에서 월남의 정예군이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자 군과 민간인에게 남부 사이공(현 호찌민)으로 후퇴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1950년 한국전 때 낙동강 교두보를 염두에 둔 전략이었으나 군관민이 얽혀 무질서한 엑서더스 외에는 모든 것이 정반대로 흘러갔다.

그 8개월 전인 1974년 8월8일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사임한 리처드 닉슨 대통령 후임이 된 제럴드 포드 대통령은 사이공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코친 차이나 지역만이라도 유지하자며 의회에 군사 개입을 승인해줄 것을 요구했으나 압도적 다수로 거부됐다.

티우는 국가존망 상황에서 국민은 물론 그의 군내 핵심 지지 세력인 해병대의 배척당했고 미국으로부터도 버림을 받았다.

결국 그는 대통령직에서 사임하고 대만을 거쳐 미국으로 재빠르게 망명했다.

자유 월남이 공산 월맹에 먹히느냐는 상황에서 국민도 대통령을 버렸고 대통령도 그 국민을 외면했다.

그 국민에 그 대통령이다. 미국이 월남 포기는 월남 국민과 지도자의 자업자득이다. 월남은 망했다.

1950년과는 전혀 다르게 1975년 미국의 처지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3년 전 미중화해를 이룩, 베트남전 개입의 근본 원인인 중국의 위협을 해소하였고 막대한 군비 지출로 경제 상황은 악화일로를 걸었다.

베트남인의 반미 의식과 미국 내 반전 열기에 미국민은 넌더리를 내는 상황이었다

1950년 미국은 나치 독일이 덩케르크까지 밀어닥쳤던 것처럼 붉은 군대가 서유럽을 집어삼킬지 모른다는 위기 의식에 중국 대륙을 적화한 마오쩌둥이 스타린과 손을 잡자 패닉 상태에 빠졌다.

16개국이 유엔군을 결성한 것은 십자군 운동 초기의 모습과 아주 닮았다

그러나 1975년은 타락할 대로 타락한 십자군 전쟁 말기와 같았다. 1950년과 1975년은 달라도 너무너무 달랐다.

사이공이 함락됐을 때 미국 한 언론은 이를 두고 '이슬람 영웅 살라딘의 예루살렘왕국 정복'에 비유하기도 했다.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철군에 빗대기도 했다.

티우 역시 디엠처럼 각주구검한 셈이다.

사이공 함락이 카운트다운에 들어가자 월남의 전 외무장관은 티우가 한국이 1953년에 맺은 한미 상호방위 조약과 같은 것을 요구하며 파리 베트남 평화조약 체결에 서명하지 않으려 하자 닉슨이 월맹 침공시 파병하겠다고 약속한 대통령 서명의 문서를 공개하며 미국의 배신을 비난했다.

그러자 그 서명은 가짜였다는 미국 언론 보도가 뒤따랐다. 한마디로 이제 끝내자는 분위기였다.

미국인들은 앓던 이가 그러나 신경은 여전히 살아 있는 충치가 뽑혀지는 아픔을 맛 보면서도 시원한 느낌마저 가졋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하늘에 뛰어 놓은 기구를 이용한 피뢰침 실험에서 그가 지상에 연결한 철삿줄을 만졌으나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고 성공했다.

하지만 두 번째 피뢰침 실험을 한 사람은 감전사했다.

디엠과 티우 그리고 그를 지도자로 한 월남은 죽음을 피한 것은 물론 번개가 전기 현상이란 과학적 사실을 처음으로 알아내어 영광마저 얻은 첫째와는 달리 돌아올 수 없는 죽음을 맞은 '멍청하고 운도 억수로 나쁜 불행한 두 번째' 가 된 것이다.

<스위프트-류야저우-버크왈드>

류동희 차이나워치 대표 2019년 8월8일

2022/08/08 2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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